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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경북

박혁거세와 경주 금척고분군

by 배리솔밭 2023. 4. 6.

 

4번 국도에서 무열왕릉을 지나 건천으로 빠져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양옆으로 분포된 고분군을 만날 수 있다. 건천읍 금척리에 소재하고 금척고분군 혹은 금척리고분군이라고 부르는 이 고분은 4세기 말에서 6세기에 조성된 신라시대 귀족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척고분군을 가르는 도로
금척고분군을 가로지르는 도로

 

금척고분군은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당시 발굴된 부장품은 경주 분지의(대표적으로 현재의 대릉원 일원) 적석목곽분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금척고분군의 봉분 상층부를 보면 대부분이 함몰되어 꺼진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시신을 안치한 널방의 덧널이 부식하면서 돌무지와 봉토가 내려앉은 것으로 이 역시 이들 고분이 적석목곽분이라는 증거이다.

상층부가 함몰된 금척고분군
대부분 무덤의 상층부가 함몰되어 있다.

 

금척리라는 지명은 금척고분군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금척고분군은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온다. 금척이란 말 그대로 황금자를 뜻하며 이는 도량형 중 길이 단위의 기준이 되는 원기이다. 전설 속 금척은 이런 사전적 의미와는 약간 괘를 달리 하는데 박혁거세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이 자는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신묘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이에 관한 소문을 들은 중국에서 이 자를 탐하여 사신을 보내자 신라는 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수십 기의 가짜 무덤과 함께 금척을 묻어버렸으니 이것이 곧 금척고분군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약 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조선시대에 이 금척이 다시 한 번 등장하니 이성계가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아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금척이 의미하는 바를 유추할 수 있다. 이성계는 조선 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로 금척을 이용한 것이다. 거의 모든 국가의 건국신화에서 시조의 탄강설화는 선택된 자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금척, 즉 원기라는 건 시초, 근원을 의미하는 메타포로서 선택되어진 자의 징표가 되는 것이다.

 

금척에 관해 최초 기술된 자료는 고려시대 경주읍지인 동경잡기로 최종증보판은 1845(조선 헌종 11)년이다. 만약 금척에 대한 설화가 후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면 박혁거세의 출신지가 본래 진한땅이 아닌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임을 시사하고 박혁거세의 나정 설화와 같은 의도로 활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금척고분군은 4 ~ 6세기에 조성된 적석목곽분으로 박혁거세 설화와는 관련이 없는, 피장자가 실존하는 고분군이다. 특히 금척고분군의 남쪽에 해당하는 곳의 지명이 모량리이고 방제(坊制, 도로에 의해 나뉜 구획)에 의해 조성된 도시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무덤군이 진한 육부 중 하나인 모량부(=점량부, 사로 육촌 무산대수촌의 후신) 귀족의 무덤이라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또한 금척고분군의 묘제가 적석목곽분이라는 것은 무덤의 조성 시기가 통일신라 이전 마립간 시기의 것임을 말해준다. 통일신라시대로 넘어가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매장 습속도 변화하여 묘제는 횡혈식석실분으로, 능묘역은 분지에서 산록으로 이동하는데 금척고분군에서 이동한 곳이 방내리고분군으로 보인다.

 

금척고분군에 직접 가보면 도로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는데 능묘역이 원래 분리된 것은 아니고 일제강점기인 1909년 대구-경주간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갈라진 것이다. 고분의 규모는 경주 내 대릉원을 제외한 분지형 능묘역 가운데 가장 크다. 특히 도로의 서쪽에 분포된 봉분이 동쪽보다 크며 대릉원 천마총급 정도 크기의 무덤이 다수 존재한다.

금척고분군 동쪽
동쪽 방면 봉분. 멀리 무산 대수촌 촌장 구레마가 내려왔다는 이산, 즉 구미산이 보인다.
금척고분군 서쪽
도로의 서쪽으로는 봉분의 규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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